밀양 혜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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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밀양 혜산서원은 경상남도 밀양시에 위치한 서원으로, 일직 손씨 가문의 5현을 배향하고 있다. 1753년 격재 손조서를 기리기 위해 서산서원으로 창건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71년 일직 손씨 문중이 서산서원 터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5현의 서원을 통합하여 혜산서원으로 복원하였다. 혜산서원에는 손홍량, 손조서, 손처눌, 손린, 손우남 등 일직 손씨 가문의 5현이 배향되어 있으며, 1,300여 평의 대지 위에 13동의 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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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혜산서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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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밀양 혜산서원 |
한자 표기 | 密陽 惠山書院 |
유형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297 |
지정일 | 1994년 7월 4일 |
시대 | 조선시대 |
주소 |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원1리길 17-18 (다죽리) |
관리자 | 손태규 |
수량 | 13동 |
문화재청 ID | 21,02970000,38 |
2. 역사
밀양 혜산서원은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죽서마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일직 손씨 가문의 다섯 명현(五賢)을 모시는 서원이다. 이곳은 본래 조선 영조 29년(1753년)에 격재(格齋) 손조서(1412년~?)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던 터이다. 손조서는 조선 초,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사건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했던 인물이다. 후대 사림들이 그의 충의와 절개를 기려 서원을 세웠으나,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헐렸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난 1971년, 일직 손씨 후손들이 훼철된 서산서원 터를 중심으로 서원을 다시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서원 경역을 넓히고, 안동, 대구, 영천 등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직 손씨 명현 다섯 분을 모시던 서원들을 이곳으로 옮겨와 통합하였다. 이렇게 새로 건립된 서원에 혜산서원(惠山書院)이라는 이름을 붙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1. 서산서원
서산서원(西山書院)은 본래 영조 29년(1753년)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1412~?)를 기리기 위해 창건된 서원이다. 손조서는 조선 초기에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등 횡포를 부리자 이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밀양 산외면 다죽리 죽서마을로 돌아왔다. 그는 충의(忠義)와 높은 절개(卓節)를 지키며 세상과 교류하지 않고 오직 도학(道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후대의 사림들이 그의 학문과 절개를 높이 평가하여 그가 머물던 곳에 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서산서원은 헐리게 되었다. 서원이 헐린 이후 그 자리의 집은 "서산고택(西山古宅)" 또는 "철운재(徹雲齋)"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현재의 밀양 혜산서원은 바로 이 서산서원이 있던 자리에 새로 건립된 것이다.2. 2. 혜산서원 복원
혜산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본래 조선 영조 29년(1753년)에 창건된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던 곳이다. 서산서원은 조선 초기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했던 격재(格齋) 손조서(1412년~?)를 기리기 위해 후대 사림들이 세운 서원이다. 그러나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이후 1971년, 밀양 산외면 다죽리 죽서마을에 세거하던 일직 손씨 문중은 서산서원 터를 중심으로 서원 경역을 확장하고,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일직 손씨 명현(名賢) 다섯 분을 모시던 서원을 이곳으로 옮겨와 통합 복설(復設)하였다. 통합된 서원은 혜산서원(惠山書院)으로 명명되었다. 통합된 다섯 현(賢)과 기존에 배향되었던 서원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자/호 | 생몰년 | 기존 배향 서원 |
---|---|---|---|
손홍량 | 정평(靖平) | 1287년 ~ 1379년 | 안동 타양서원(陀陽書院) |
손조서 | 격재(格齋) | 1412년 ~ ? | 밀양 서산서원(西山書院) |
손처눌 | 모당(慕堂) | 1553년 ~ 1634년 | 대구 청호서원(靑湖書院) |
손린 | 문탄(聞灘) | 1566년 ~ 1628년 | 대구 봉산서원(鳳山書院) |
손우남 | 륜암(綸菴) | 1564년 ~ 1623년 | 영천 입암서원(立巖書院) |
밀양 혜산서원에는 일직 손씨 가문의 5현(五賢)이 배향되어 있다.[1] 이들은 본래 각기 다른 서원에 모셔져 있었으나, 1971년 후손들이 세거지인 이곳 밀양에 혜산서원을 새로 짓고 함께 모시게 되었다.[1] 배향된 인물과 본래 모셔졌던 서원은 다음과 같다.[1]
복설된 혜산서원은 약 1,300여 평의 대지 위에 사우(祠宇), 강당(講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상례문(尙禮門), 신문(神門), 중문(中門), 전사당(典祀堂), 신도비각(神道碑閣), 다원서당(茶院書堂), 이이정(怡怡亭), 고사(庫舍), 대문(大門) 등 총 13동의 건물이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3. 배향 인물
3. 1. 손홍량 (孫洪亮, 1287~1379)
손홍량(孫洪亮, 1287~1379)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호는 정평(靖平)이다. 그는 일직 손씨의 명현(名賢) 다섯 분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다. 본래 안동의 타양서원(陀陽書院)에 모셔졌으나, 1971년 후손들이 세거지인 밀양의 혜산서원을 중건하면서 다른 네 분의 명현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와 모시게 되었다.
3. 2. 손조서 (孫肇瑞, 1412~?)
손조서( , 1412년 ~ ?)는 조선 초기의 학자로, 호는 격재()이다. 그는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것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충의()와 높은 절개()를 지키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오직 학문 연구에만 힘썼다.
후대 사림들은 그의 삶을 기려 영조 29년(1753년) 밀양 산외면 다죽리 죽서마을에 서산서원()을 세웠다. 하지만 이 서원은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서원이 헐린 뒤 남은 집은 '서산고택()' 또는 '철운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71년, 옛 서산서원 터를 포함하여 경역을 확장 정비하면서 손조서를 포함한 일직 손씨 가문의 다섯 명현()을 함께 모시는 현재의 밀양 혜산서원으로 거듭났다.
3. 3. 손처눌 (孫處訥, 1553~1634)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1553~1634)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손처눌은 대구 청호서원(大邱 靑湖書院)에 모셔져 있었다. 1971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직 손씨 명현들의 서원을 통합하여 밀양 혜산서원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손처눌을 모시던 청호서원도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로써 손처눌은 손홍량, 손조서, 손린, 손우남과 함께 혜산서원에서 모시는 다섯 명의 현인(五賢) 중 한 명이 되었다.
3. 4. 손린 (孫遴, 1566~1628)
손린(孫遴, 1566년 ~ 1628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호는 문탄(聞灘)이다. 일직 손씨의 명현(名賢) 다섯 분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본래 대구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으나, 1971년 후손들이 세거지인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죽서마을에 밀양 혜산서원(惠山書院)을 중건하면서 다른 네 분의 서원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와 배향되었다.
3. 5. 손우남 (孫宇男, 1564~1623)
륜암(綸菴) 손우남(孫宇男, 1564~1623)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래 영천의 입암서원(立巖書院)에 봉안되었으나, 1971년 일직 손씨 후손들이 밀양 혜산서원을 복설(復設)하면서 다른 네 명의 명현(名賢)들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되었다.
4. 건물 및 시설
혜산서원은 약 1,300여 평의 대지 위에 세워져 있으며, 경내에는 사우(祠宇), 강당(講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상례문(尙禮門), 신문(神門), 중문(中門), 전사당(典祀堂), 신도비각(神道碑閣), 다원서당(茶院書堂), 이이정(怡怡亭), 고사(庫舍), 대문(大門) 등 총 13동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4. 1. 주요 건물
서원의 경역은 1,300여 평의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총 13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주요 건물과 그 기능은 다음과 같다.- 사우(祠宇): 손홍량, 손조서, 손처눌, 손린, 손우남 등 일직 손씨 5현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다.
- 강당(講堂):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던 중심 건물이다.
-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유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기숙사 건물이다.
- 전사당(典祀堂): 서원 내 제사와 관련된 여러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 기타 건물: 이 외에도 상례문(尙禮門), 신문(神門), 중문(中門), 신도비각(神道碑閣), 다원서당(茶院書堂), 이이정(怡怡亭), 고사(庫舍), 대문(大門) 등이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4. 2. 기타 시설
혜산서원 경내에는 사우, 강당, 동재, 서재 등 주요 건물 외에도 다음과 같은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1]- 상례문(尙禮門), 신문(神門), 중문(中門): 서원 내부의 공간을 나누고 출입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문이다.
- 신도비각(神道碑閣): 서원에서 모시는 5현(손홍량, 손조서, 손처눌, 손린, 손우남)의 공적을 기록한 신도비를 보관하는 곳이다.
- 다원서당(茶院書堂): 학문을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사용된 서당 건물이다.
- 이이정(怡怡亭): 경내에 세워진 정자로, 휴식과 교류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 고사(庫舍): 서원 운영에 필요한 각종 물품이나 살림살이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 대문(大門): 서원으로 들어서는 가장 바깥쪽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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